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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원소의 미녀들

천만불사나이 2020. 6. 8. 03:44

미술관 회원이 되면 어깨도 좀 으쓱거려지고 예술 발전에 기여(?)한다는 알량한 자부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신 목돈이 나가는 가슴쓰린 경험을 해야 하지요. 학생 때에는 45달러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1년 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그것도 가슴이 떨려서 등록을 못했던 접니다. 당시 입장료가 12달러였으니까 4번만 가도 본전은 뽑는 건데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보스톤 미술관에서 딴에는 거액(?)을 신용카드로 그어가면서 회원 가입서에 싸인을 해버린 정신나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메국 주요도시의 26개 미술관엘 '당당하게 공짜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혹했던 것인데, 특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시

 

 

그런데 그렇게해서 손에 넣은 플라스틱 카드 덕분에 미술관에 갈 때 '한번에 많이 보려는' 욕심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이젠 한번 가면 딱 한 군데만 보고 옵니다. 한꺼번에 많이 봐야 별 소용없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달은 셈인데, 그건 제 감성 용량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암튼 저지난 주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갔을 때는 "피트리 유럽 조각 실내 정원"에서만 2시간을 배회하다가 나왔습니다. 미술관 1층 왼쪽 깊숙이 마련된 채광이 잘된 긴 회랑인데 18-19세기 유럽 (주로 프랑스와 이딸리아) 조각을 모아놓은 곳입니다.

 

 

캐롤 & 밀톤 피트리, 유럽 조각 실내 정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시

 

 

두 분이 모두 뉴욕대 미술대학 교수였던 캐롤과 밀톤 피트리 (Carroll and Milton Petrie)부부의 이름이 이렇게 널찍한 공간에 붙은 걸 보면 아마도 적지 않은 돈과 소장품을 기증했던 모양입니다. 바로 옆에는 같은 이름이 붙은 까페도 하나 있는데, 음식 맛은 정갈하고 커피 맛도 참 좋습니다. 큼직큼직한 유리창 너머로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고도 불리는 날씬한 오벨리스크도 볼 수 있습니다. 음식값이 비싼 게 약간(?)의 흠이기는 합니다만.

 

저는 대개 다짜고짜 이층의 그림 섹션으로 올라가곤 했으므로 이곳에서 진득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만, 이날은 그곳 전면 벽에 나란히 늘어 서 있는 '네 명의 미인'이 눈길을 잡아끌더군요. 더구나 그 조각의 '명찰(?)'을 보고는 갑자기 흥미가 치솟았습니다.

 

 

4원소 미녀들 (1750년경), 왼쪽부터 <공기>, <불>, <흙>, <물>

쟝삐에르 디프랑 (Jean-Pierre Defrance)의 작품 으로 추정

 

 

<다빈치 코드>로 유명해진 댄 브라운(Dan Brown)의 다른 소설로 <천사와 악마(Angels and Demons, 2000)>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바드 기호학자인 로버트 랭던이 바티칸에서 차례로 죽어간 네 명의 추기경의 살해 이유를 파헤치는 이야기지요. 그 네 명의 사체에는 앰비그램(Ambigram)이 문신처럼 찍혀있었는데, 그건 바로 "" "" "공기" ""이라는 낱말이었습니다. 추기경들은 자기 몸에 이름이 찍힌 바로 그 물건으로 죽임을 당했지요.

 

그 네 물질의 이름은 피트리 조각 정원의 전면 벽을 지키고 선 네 미인들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세상의 기본 원소라고 믿었던 물질들입니다. 신기한 일 아닙니까? 어째서 저런 절세의 미인들이 그런 '고리타분(?)'한 혹은 '무시무시한(?)' 이름을 갖게 됐을까요?

 

<물 (L'eau)>

 

탈레스(Thales, 기원전 624-546)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해서 '근본 원소'론의 첫발을 뗐습니다. 탈레스가 어째서 물이 만물의 근본이라고 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아마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존재할 뿐 아니라 사람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그랬을 지도 모릅니다. 또 온도와 압력에 따라서 기체와 고체로 자유롭게 변하는 게 신기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이 여인네가 어째서 ''을 가리키게 됐는지를 알려주는 단서는 별로 없습니다. 그저 여인의 물동이에서 물이 철철 흘러내리고, 오른쪽 아래에 함께 조각된 어린아이가 물고기를 타고 노는 모습이 전부입니다. 어쩌면 조각가는 생명이 물에서 탄생했으며 물고기로부터 발전했다는 진화론적인 설명을 표현하려 했던 걸까요?

 

 

<공기 (L'Air)>

 

 

'물 미인'의 정 반대편 끝에는 '공기 미인'이 서 있었습니다. 공기를 표현할 다른 매개물이 없어서였는지 여기서는 공기를 가리키는 소품이 하나 뿐입니다. 여인 오른쪽에 선 어린아이가 들고 있는 피리가 그것이지요. 피리는 공기가 일으키는 바람으로 소리는 내는 법이니까요.

 

미인들과 꼭 쌍으로 등장하는 어린아이의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그 날개가 워낙 작고 앙증맞기 때문에 '달려 있다'기 보다는 '돋아났다'고 해야 적합할 지도 모릅니다. 각 미인과 어린 천사의 모습은 비너스와 큐피드를 연상시킵니다. 각 큐피드는 다들 중요한 물건을 하나씩 들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미인의 상징을 대변하는 것이지요. 다만 그 물건이 '활과 화살' 같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만물의 4요소'라는 다소 딱딱한 것이기는 하지만요.

 

세상 만물의 근본이 '공기'라고 주장했던 자연철학자는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기원전 588-524)였습니다. 그는 자기 스승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한 물도 사실은 '공기'의 특수형태라고 주장했지요. 공기가 희박해지면 ''이되고, 농축되면 ''이 되며, 더 농축되면 ''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흙 (La Terre)>

 

 

한편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기원전 570-480)는 만물의 근원을 ''이라고 보았습니다. 흙 속에는 물도 흐르고, 불도 뿜어 나오고, 공기도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든 중요한 원소들이 흙 속에 들어 있으므로 그게 만물의 근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은 경험적으로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매년 주기적으로 흙은 목초와 곡과를 키우고 열매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물 미인' 왼쪽 옆에 세워진 '흙 미인'은 팔에 과일과 채소를 한아름 안고 있고, 그녀 발 밑의 큐피드는 낫으로 막 벤 이삭을 한 줌 집어서 여인에게 건네고 있습니다.

 

 

<불 (Le Feu)>

 

 

한편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기원전 541-475)는 만물의 근본이 ''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변화와 순환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변화와 순환을 만들어내려면 그 자체가 가장 활발하고 형태가 자유로워야 한다고 봤지요. 그게 바로 ''입니다.

 

특히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 꺼지면 공기와 물과 흙으로 나뉘어 각각 아래위로 흩어지게 된다고 봤습니다. 그리고는 흙으로부터 물이 생기고, 공기로부터 불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양 자연철학에서는 최초로 '윤회' 개념을 갖게 된 것이지요.

 

조각에서도 이 여인이 '불의 미인'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역시 큐피드의 손에 쳐 들린 횃불입니다. 횃불이라고 하면 워낙 프로메테우스에만 익숙해 진 저로서는 '큐피드의 횃불'이라는 게 얼른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만,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든 큐피드의 불이든 그것은 인류문명의 시발점이었던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한편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기원전 483-435)는 앞의 네 사람 주장을 뭉뚱그려서 "만물은 흙과 물과 공기와 불의 네 가지 원소로 돼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남들이 열심히 개발해 놓은 밥상에다가 힘 하나 안들이고 슬쩍 숟가락만 하나 더 얹은 셈이지요. 게다가 요즘은 만물의 '유일한' 근본요소를 주장했던 네 사람보다는 그들의 '4원소'를 슬쩍 종합해 놓은 엠페도클레스가 더 유명합니다. 그러게 종합도 잘만 하면 웬만한 창작보다 나은 법입니다.

 

 

<4원소의 미인들(1750년 경)>

오른쪽부터 <물>, <흙>, <불>, <공기>

 

그러나 엠페도클레스도 그냥 남의 주장을 종합하는 데에 머물기는 좀 미안했던지, 이 네 원소들을 결합시키거나 결별시키는 두 가지 힘이 "사랑(philia)과 미움(neikos)"이라는 주장도 폈습니다.  4원소가 서로 좋아해서 끌리거나 싫어해서 밀어내는 힘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배합을 이루어 만물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낭만적인 화학'입니다.

 

제가 워낙 예술을 모르고, 그 중에서도 조각을 특히 잘 모릅니다. (드가의 <14살 무용수>와 로댕의 <깔레의 시민>은 예외.) 그래서 이 <4원소 미인>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조각가 쟝피에르 데프랑(Jean-Pierre Defrance)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사실 미술관 측에서도 조각의 기법으로 보아 데프랑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4원소 미인>들은 원래 프랑스의 노라망디 지역 르앵 근처의 무쎄그로 성(Chateau de Mussegros) 야외 정원에 전시돼 있던 것인데, 1964년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사들이고 기증 받은 것입니다. (설명 패찰에 그렇게 돼 있더군요.^^)

 

실물보다는 거의 2배 가량 크게 만들어진 조각상들이지만 그다지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커다란 석회암들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미인들과 앙증맞은 날개를 단 어린아이들을 깍아냈기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왼쪽부터 <물>, <불>, <흙>, 그리고 <공기>

원래는 서로 뚝뚝 떨어져 있지만 간단한 포샵질^^로 한데 모았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시면 "피트리 유럽 조각 정원"에 한번 가보시지요. 우람한(?) 팔뚝과 퉁퉁한(?) 허벅지라는 치명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기적 처럼 쭉쭉빵빵을 유지하고서 속이 다 비치는 겉옷 하나만 걸친 채, 매일 몰려드는 수만 명의 관람객들을 향해, 지금은 '과학'이라기 보다 '신화'로 여겨지는 고대 그리스의 황당한 자연철학을 설파하는 네 명의 미인들을 한번 만나보시라는 말씀입니다.

  

만물의 근원인 4원소가 모두 여성들로 대표되는 것이 불만이신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건 <다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에게 물어보는 게 빠를 지 모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여성성 숭배"의 오랜 전통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고대 이집트의 이시스에서 시작해서, 2천년전 팔레스타인의 막달라 마리아를 거쳐, 빠리 경찰청 암호해독반의 소피아 네부에 이르기까지.

 

 

물(Water)              흙(Earth)            불(Fire)           공기(Air)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2000)>에 등장하는 4원소의 앰비그램들.

어째서 앰비그램이 고대 헬라어나 라틴어가 아니라

잉국말로 돼 있느냐는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합니다.

 

아 참, 앰비그램이 뭔지 궁금하신 분들도 계실까요? 거꾸로 뒤집어서 읽어도 똑같은 낱말을 되도록 도안된 그림글자를 가리킵니다. 예컨대 위 그림글자들은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4원소의 이름을 앰비그램으로 만든 것입니다. 모두 <천사와 악마>에 나오는 것이지요. 물구나무를 서시거나 모니터를 거꾸로 돌려서^^ 한번 보세요. 거꾸로 읽어도 같은 글자들이지요?

 

또 댄 브라운은 ", , 공기, "을 한꺼번에 합쳐서 쓴 앰비그램도 만들어서 제시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앰비그램 만들어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앰비그램 만들기를 업으로 삼는 전문가도 있을 정도니까요.

 

 

<4원소>를 한데 모은 앰비그램.

마우스 클릭으로 움직이는 앰비그램을 보시려면, 이 앰비그램의 작성자인

존 랭던의 홈페이지 (http://www.johnlangdon.net/angelsanddemons.html)에 가 보세요.

 

 

댄 브라운으로서는 <천사와 악마> 집필에 필요한 앰비그램을 만들어 준 전문 앰비그램 제작자 존 랭던(John Langdon)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천사와 악마> <다빈치 코드>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 바로 로버트 랭던(Robert Langdon)입니다. 우연일까요?

 

 

 

평미레 드림

12/19/2005

 

 

 

출처 : 블로그 > 평미레 | 글쓴이 : 평미레 [원문보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갈 터-- 흙이란 모든 원소의 총합체이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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