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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월10일)이 미국의 국경일인 '콜럼버스 데이' 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공휴일로 지정된 국경일이 연간 다 합쳐봐야 10개 밖에 안됩니다. 그 중 하나인 콜럼버스 데이인데, 정부 차원의
행사는 커녕, 신문과 방송에서도 뭐하나 특별한 광고나 고지가 없습니다. "오늘 정말 콜럼버스데이
맞아?" 라고 혼자서 몇번인가 의아해할 정도였습니다.
저녁 밥상머리에서 7학년(중학 1학년)에 다니는 아이에게 물어봤습니다. "학교에서 콜럼버스 데이라고 해서 뭘 가르치더냐"고. 아이는 역시
"아무것도 없던데"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래서 알고보니, 이유가 있더군요. 미국인들의 콜럼버스를 보는 눈이 바뀌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콜럼버스 데이는 말 그대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한 날을 기리는 국경일입니다.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12일 미
대륙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10월12일이 콜럼버스 데이인데, 1970년대부터 '10월 12일에서 가장 가까운 월요일'로 날짜가
바뀌는 바람에 올해는 10월10일이 되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대대적으로 전국적 행사를 가졌다고 합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왕의 명을 받고 항해에
나섰지만 이태리인입니다. 미국은 이날을 콜럼버스로 대표되는 '탐험과 개척의 정신'을 상징하는 날로 기념해 왔고, 학교에선 그런
콜럼버스의 위대한 정신을 가르쳤습니다. 미국은 따지고보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생겨난 나라이니, 콜럼버스를 특별히 기념할만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천대받는 국경일입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위대한 탐험'이 아니라 '잔학한 침략'이라는 시각이 너무나 넓게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19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500주년 때는 미국 정부가 아무런 행사조차 못 열 정도로 저항이 컸다고 합니다.
특히 콜럼버스 이후 500년간 도륙의 역사를 당해온 미국 인디언들의 입장이 고려됐습니다.
역사적 사실에서도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아니고, 신대륙이라는 말조차 유럽인들의 주관적 용어일 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콜럼버스가 카리브해 어느 섬에 도착하기 그 400여년 전, 즉 1000년 경부터 이미 바이킹들은 이 신대륙에 들어와 활동을
했다는 것이 바이킹 배 잔해를 탄소연대측정한 결과 입증됐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나선 목적도 순수한 탐험정신은 커녕, 과거 식민지 영토확장의 시대가 다 그랬지만, 금에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알려진 것과 달리 금이 없자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금 대신 싣고 갔습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이후 '정복자' 피사로와 코르테스의 발길로 이어졌고, 이는 아즈텍과 마야, 잉카 등 남미 대륙에 존재하던
문명의 야만적 파괴로 연결됐습니다. 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인들의 병원균이 옮겨져 오는 바람에 미 대륙에 있던 인디언들이 멸절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가 처음 도착했을 때 따뜻히 반겨주던 카리브해의 히스파놀리아라는 섬의 Taino족은 콜럼버스가 도착할 때만해도 인구가 30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럽의 병원균들에 대한 면역이 전혀없던 인디언들은 삽시간에 퍼진 천연두, 결핵, 홍역 등으로 4년만에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고, 결국엔 전멸됐습니다.
최근 나온 책중에 찰스 만이라는 역사저널리스트가 쓴 '1491년: 콜럼버스 이전 미국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얼마전 뉴욕타임스 서평란에 크게 소개돼 유심히 읽은 적이 있는데, 미 대륙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9000만~1억2000만명의
인디언들이 살았다고 돼 있습니다. 당시 지구상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으로 오기 전, 이미 이곳까지 진출해 어로작업을 하던 영국 어부들이 옮긴 병에 걸려 속수무책으로 죽어갔고,
16세기가 되기 전 문명은 초토화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미국 대륙 곳곳에서 폐허가 된 채 발견되는 문명의 잔해들은 '왜
이런 문명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을까'하는 수수께끼를 그동안 남겼습니다. 찰스 만에 따르면 이처럼 유럽의 질병에 걸려
인디언들이 순식간에 멸절되는 바람에 문명이 황폐화 됐다는 것입니다.
과거 읽은 책중에는, 미국이 개척시대에 살해한 인디언이 2000만명이 넘는다는 대목도 있더군요. 그래서인지 올해초 미
연방상원은 미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 선조들이 인디언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사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고,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군에
'인디언 박물관'을 추가로 건설해 성대한 개관식을 갖기도 했습니다.
어떻든 미 대륙에서 지난 500년 동안 벌어져온 이 모든 끔찍한 역사의 원죄가 바로 콜럼버스에서 출발한다는 시각입니다.
이런 부정적 시각 때문에, 미국에서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의 의미는 학교 선생님들마저 아이들에게 자신있게 가르치지
못하는 역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썰렁한 콜럼버스데이는 이런 사회적 변화의 결과입니다.

미 연방의회 의사당 지붕꼭대기에는 콜럼버스가 동쪽 대서양을 바라보는 동상이 얹혀져 있습니다. 콜럼버스는 그렇게 신대륙에 세워진
나라 미국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동상을 바라보며 어떤 이들은 미국의 정신이라고 하는 '개척과 탐험'이라는 말을 떠올릴 것이고, 어떤 이들은
'잔혹한 침략과 살륙' 의 역사를 생각할 것입니다. 역사란 그렇게 늘 새롭게 해석되고 바뀌는 모양입니다.
요즘 우리의 현대사를 두고서, 어떤 이들은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이들은 부끄러워하는 것도, 콜럼버스와 같은 경우일까요.
10/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