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熙)는 연호를 재건(再建)이라 한 후 공방(工房)을 크게
짓고 시전(市廛)을 정비하려 하였으나 재화가 부족하였다. 정유공장과 제철소와 조선소는 만(晩)이래 한이들의 꿈이었다.
아방의 로스토우(Rostow)라는 선비가 개발도상국에서의 경제발전단계론을
들고 나오며 국가주도의 개발 전략 모델을 설파하였는데 그것을 희(熙)에게 가르쳤다.
한이(韓夷) 무신들은 왜노의 만주국(滿洲國) 경제개발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러나 처음 이년 동안은 나라 일을 행하는 물리를 몰라 하는 일마다 서툴렀고 시행착오가 많았다. 정치적인 전망도
불투명하여 나라 살림이 오히려 쪼글아 들고 백성들의 민생고는 더 악화되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재건3년에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활동사진이 상영되어 빈궁한 처지의 한이 백성 삼천만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희(熙)가 급히 천자에게 원조를 구했으나 이미 만(晩)의 시절에 더 이상 그저 주는 일은 없다고 한 바 있었다. 천자께서는 이웃 왜노(倭奴)와 화평을 약조하면 돈을 빌려주겠노라고 하교하시었다. 원래 희(熙)와 필(必)이 왜노(倭奴)의 풍습에 익숙한 자들이라 순순히 말을 들었다.

박정희 이께다 김종필
필(必)을 내세워 교섭을 시작하니 화평조건이 한이에 심하게 불리하다하여
6월에 온 나라의 유생들과 학동들이 큰 시위를 벌였다. 再建 5년에 드디어 왜노(倭奴)에 대해 삼포를 개항하였다. 필(必)의 공화당이
왜노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후 왜노(倭奴)의 기술과 반제품를 이용해서 만든, 한이(韓夷)의 물산을 실은 배가 처음으로 큰
바다에 나가게 되었다. 한이(韓夷)땅에 모처럼 굶주린 자가 줄어들고 나라의 살림이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희(熙)가 채택한
수출 산업 중심이라는 방향은 옳았다.
또한 거상들이 공방을 지을 돈을 해외에서 빌릴 때 나라에서 지급보증을
한다는 방식도 비시장적인 것이기는 하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 두 가지 정책에 덧붙여 부지런하고 손재주가 뛰어나며 공부까지 많이 한
노동력이 풍부하였고, 왜노(倭奴)라는 중간재와 기술의 공급기지가 아주
가까이 있었으며 또한 냉전의 교두보를 유지시키기 위해 아방의 천자가
특별히 열어 준 거대한 수출시장이 있었다는 것이 중남미나 아프리카의
다른 개발 독재 국가들과 차별되는 조건들이었다.
또한 다른 후진국들에서는 무신들이 서로 권력을 다투어 난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만 한이의 경우 무신란에 반대했거나 불만이 있는 장수들도 혼란을
피하여 자중했으니 그 점 매우 기특하다 할 것이다.

섬유와 가발이 수출 주종이었다.당시 최첨단 산업은 합판산업.
본질적인 문제도 있었다. 조정 자체가 민주화 되지 않고 권력자들에 대한
견제가 없었음으로 자연히 정경 유착으로 흘렀고 사업권이나 차관지원의 선정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치 제도가 합리적으로 굴러간다는 믿음을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아 기술개발이나 경영혁신 노력보다는 사적인 연고를 이용한 탈법적 관행에 길들어졌다. 또한 내수 시장과의 균형 발전을 외면하고 자본과 시장과 기술을 지나치게 해외에 의존함으로서 외부의 충격에 쉽게 흔들린 면이 있었다.
은행은 힘있는 장수(將帥)들이 시키는 대로 돈을 빌려주곤 했다.
백성들에게는 2부의 이자를 놓아 모은 돈으로 거상들에게 1부로 빌려주었다. 거상들이 사업을 잘못 벌여 망할 지경에 놓이면 되면 다시 더 큰 돈을
빌려 막아 주었다.
물가와 환율을 계속 오르니 돈을 빌릴 때는 큰돈이었으나 갚을 때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설사 거상이 사업에서 망한다 하더라도 가진 땅값이 올라
손해 보지 않았다. 그런 특혜와 좋은 여건에도 망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는데 이들은 회사가 망하기 전 자기 돈을 빼돌려 놓았고
추궁하는 이에게는 뇌물로 때웠으니 또한 손해 볼일
없었다. 그러니 너도 나도 힘있는 장수(將帥)들에게 연줄을 대려고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요정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대로에는 [성실한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이라는 플래카드가 펄럭이고 있었다.


요정정치, 헉! 실수 70년대 요정은 이런 요정

권력의 노리개 고 정인숙씨 - 오빠로부터 명예 살인을 당한다.
희(熙)와 그의 장수(將帥)들은 외방으로 나가는 물건 값을 싸게 하기 위해
일꾼들의 품삯을 묶어 두었다. 낮은 쌀값을 유지하니 도시빈민은 생계에 보탬이 되었으나 농사짓는 이들은 갈수록 빈궁해졌다.
재건
5년과 6년에 삼남에 큰 가뭄마저 들어 이들이 하는 수없이 농촌을 떠나 도시 빈민에 합류하니 일꾼들 품삯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어
좋았다.
농사꾼과 일꾼들의 희생, 백성들의 인내 그리고 무신 주도 세력들의 보호에 의해 수출업체들은 싼 물건들을 만들어 내었고
아방에서 그들을 어여삐 여겨 물건을 사주니 나라 살림은 꾸준히 성장하였다.
한편 탐관오리들의 사사로운 정리에 얽힌
일처리와 부정부패, 공정한 기회의 박탈, 巨商들의 인색한 착취, 독점을 꾸짖는 선비들과 유생들, 소상인, 장인들이 있었는데 희(熙)와 무신들은
이들의 나무람을 귀 기울여 듣기 보다는 나라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하고 북쪽 오랑캐에 돕는 일이라 하여 오히려 가혹하게 탄압하니
한이(韓夷)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전태일
이때 평화스런 시장의 일꾼 하나가 “근로기준법이란게 있었네”라고 외치며 스스로 몸을 불사른 일도 있었다. (4번째 글 끝)
보충 이미지

정주영... 미군 부대 공사를 통해서 착실히 돈을 모으다가 박정희와 [쇼부]를 치며 대재벌로의 비약 한다.

허장강과 황해 - 어떻게 두 사람이 동시에 낚을 수 있는가.

드디어 등장한다. 선데이 서울

오 라이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