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진시황제에 대한 다양한 평가 중의 하나이다.
이 글의 원문은 http://www.mediamob.co.kr/aciles/blog.aspx?id=39855 이며 전체적인 내용에 변화 없이 조금 손을 봤다.
"진시황제가 무너뜨린 통일 진나라"
史記 列傳 | 2005-03-24 00:52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는 통일 이후 15년, 진시황 사후 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도대체 왜 그토록 강대한 힘으로 천하를 통일한 제국이 그리도 짧은 시간에 그리도 무력하게 망했을까? 통일 진 제국을 세우는 데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 나라를 연 진 양공, 기틀을 다진 진 목공, 국력을 크게 떨친 진 효공, 그리고 드디어 통일을 눈앞의 현실로 만든 진 소왕, 수많은 장수와 신하들 또한 제몫을 다했다. 백리해, 상앙, 장의, 백기, 몽오, 여불위 등등. 물론 여기에는 진나라 백성들과 통일을 갈망한 모든 백성들의 피와 땀, 희생, 염원도 있었다.
즉 진나라가 통일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진시황제의 업적은 사실 보잘것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는 거의 다 차려 놓은 식탁의 마무리를 한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전제, 독재, 강압, 폭압정치를 계속했다. 그 결과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으로 이루어진 값진 통일중국을 그의 사후 3년 만에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통일 진나라가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모든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진시황에게 있다. 어떤 이유는 진나라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대가를 치른 것도 있다. 세상 모든 일에서 처음이란 어려운 것이다. 시행착오도 생기고, 이것은 이후 중국을 통일한 모든 나라가 따라한 정책이다. 그러나 진나라의 경우 처음 하는 것이라서 백성들이 낯설기도 하고 저항하는 마음이 있었다.
어떤 것은 통일전과 후의 정책을 구분하지 못한 탓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진시황과 집권층의 잘못이다. 분명 통일 이후에는 백성들을 편하게 해야 했는데도 전혀 고삐를 늦추지 않고 부려먹고 괴롭혔다. 또 통일국가를 위한 토목공사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토목공사는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국가경제에 큰 충격을 주지 않고,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정도에서 해야 한다. 이 전철을 밟은 나라로 대표적인 게 수나라이다. 그리고 진시황 개인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 사직을 멸하다.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의 후사를 남기지 않고 말살하려하였다. 이전의 상(은)나라는 하나라를 멸하고 그 후손을 기나라에 봉해서 제사를 이어가게 했다. 주나라도 은나라 유민을 송나라에 모여 살게 했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이런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래서 망한 왕족들은 살해되거나 산속깊이 숨어야했다. 이런 무자비가 결국 민심을 동요시키고 진시황 사후 이들이 다시 들고일어나게 된 요인이다.
2. 기고만장, 과대망상, 안하무인의 극치
진시황제는 스스로 공은 오제보다 많고 땅은 삼왕보다 넓다하여 다른 임금들과 같이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 사기 진시황본기 - 곧 그는 통일의 대업이 자신이 잘나서라고 단단히 착각했다.
"짐은 시황제가 되고 후세에는 대수를 헤아려서 2세, 3세, 만세에 이르기까지 제위를 무궁하게 전하겠다." - 이 말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진나라가 영원히 황제를 해먹겠다는 오만함이 보이지 않는가? 일찍이 이런 발언을 한 사람이 또 있을까? 통일의 위업이 순전히 자신이 잘나서라고 생각하는 진시황제는 결국 자아도취에 빠지게 되는데 후에 그는 영생불사를 꿈꾸기도 한다.
그는 월나라 왕 구천과 성격이 비슷하여 어려울 때 괴로움을 함께 할 수는 있어도 부귀를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사람이다.
3 楮衣半道(저의반도) 道路以目(도로이목)
저의는 죄수가 입는 붉은 옷이다. 곧 길거리에 반이 죄수라는 말이다. 도로이목이란 학정에 대한 비판을 말하지 못하고 서로 길에서 눈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는 말이다.
전 국민의 10%가 중정요원이었던 시절.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감옥에 끌려가던 시절이 생각난다. 통일 이후에 법을 단순화시키고 형벌도 줄여야했는데 오히려 더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결국 진시황제는 백성들의 지지를 스스로 차버렸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진나라는 오행에서 수덕에 해당하는데 수는 법이다. 그래서 유난히 엄격한 형벌, 잔혹한 법을 시행했다고도 말한다.
진승, 오광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엄한 진나라 법 때문이었다. 진나라 관리로 인부들을 모집해 이송하던 이들은 큰비로 정해진 기일에 도착할 수 없게 되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진나라 법에 이 경우 무조건 사형이었기 때문에 이판사판식으로 일어난 것이다.
4. 중앙집권제, 군현제 실시(정치적 통일)
승상 왕관은 자제를 왕으로 세워서 각국을 다스리게 하자고 건의한 반면, 정위 이사는 봉건제는 주나라의 낡은 제도로 관리를 직접 파견하는 군현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진시황 26년에 36군, 나중에 47개 군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은 총수가 900개 이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중앙집권체제, 군현제는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형식이 약간씩 바뀌기는 하지만. 이런 혁명적인 제도는 결국 그때까지 봉건제에 익숙했던 백성들에게 약간 낯선 면이 있었다.
5. 도로건설(지리적 통일)
가. 치도 : 황제 전용도로로 진시황 27년(220년)에 건설되었다. 동로는 연, 제나라 방면으로, 남로는 오, 초나라 방면으로 통했다.
나. 직도 : 수도 함양 부근의 운양에서 구원으로 연결되는 직통도로로 길이가 1800리에 달하는 군사용 도로다. 진시황 35년에서 37에 걸쳐 완공되었다.
다. 오척도 : 파, 촉 지역에서 운귀 고원으로 통하는 도로. 도로 폭이 5척이어서 오척도라 하였다. 현재의 사천성 의빈시에서 운남성 곡정에 이르는 길
라. 신도 : 남부지방에 건설한 도로로 네 개의 주요 도로가 있다. 대부분 지금의 강서성, 광동성, 호남성 지역에 걸쳐있다. 원래는 군사용 도로였지만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마. 영거 : 군량미 수송을 위해 판 수로로 총 길이가 34km로 남북 두개의 수로가 있다. 이 두개의 수로가 장강과 주강을 연결해서 중원과 영남지역을 관통한다. 관개수로로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도로건설은 물론 경제적으로 큰 의미가 있지만 이런 노역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6. 만리장성(지리적 통일)
기존의 연, 조, 진나라의 장성을 연결하고 개 보수하였다. 만리장성으로 인해 이민족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였고 이후에 '장성의 남쪽은 모두 중국이다'라는 관념이 생겼다고 한다. 이 만리장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점과 의견이 있지만 여기서는 크게 언급하지 않겠다. 만리장성의 건설에 대해 호(胡)가 결국 나라를 망친다는 말에 따라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부터, 장성 건설 과정에서 죽은 남편과 이를 그리는 여인의 에피소드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만리장성이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구조물이라는 황당한 상식도 있다.(지금도 이걸 믿는 사람도 있고) 내가 볼 때 만리장성이 중국을 지리적으로 통일했다는 것은 일견 맞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을 쌓아서 스스로를 외부와 단절시켜버렸고 이것이 후대에 서양에 뒤지게 되고 반식민지가 된 원인은 아니었을까? 고립은 결코 최선이 아니다. 물론 당장은 외적의 침입으로 부터 안전하게 되었겠지만.
어쨌든 만리장성 건설로 희생된 백성들의 피가 결국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물론 만리장성이 진 제국을 붕괴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지만 이것은 아방궁과 더불어 너무 강조된 면도 있다.
만리장성 건설에 30만, 남쪽 오령 수비에 50만, 아방궁과 여산의 묘를 건설하는데 70만, 그밖에 도로, 교량, 수로 건설에 투입된 인원을 합하면 총 200만 명에 이른다. 이는 그 당시 전체 인구 2000만의 1/10에 달하는 엄청난 인력이었다.
7. 도량형, 문자, 화폐 통일
통일 직후에 진시황제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에 통일된 도량형 기구를 보급했다. '말은 소리가 다르고, 문자는 모양이 다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문자 통일을 추진하였다. 진나라 소전을 통일서체로 정했다. 통일 이전에 포폐, 도폐, 원전, 의비전 등이 여러 나라에서 쓰였다. 진시황 37년에 화폐 개혁 령을 공포해서 진 반량으로 통일하였다. 위 세 가지 통일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도량형, 문자, 화폐 통일에도 반발한 세력은 있었을 것이다. 도량형이 가장 먼저 쉽게 통일되었다. 이거야 단순한 규격통일이니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의 통일은 어느 정도 진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서로 다른 문자, 말을 쓰던 사람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없어지는 문자, 말을 쓰던 타국인들은 적지 않게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화폐의 통일은 오늘날로 치면 환율을 재조정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아무래도 진에 흡수된 6국의 상인, 재산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재산평가액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 화폐통일이 진시황제가 죽기 한해 전인 37년에 이루어진 것만 보아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8. 사상 통일
분서(33년, 214년) : 진시황제의 생일맞이 연회에서 순우월과 이사가 논쟁을 벌였다. 거기서 이사는 이제 더 이상의 비판은 필요 없다며 몇 가지 실용서적을 제외한 방대한 서적에 대한 분서를 건의한다. 그는 분서를 통해 각국의 역사를 말살하려했다. 제자백가의 서적을 태워서 정책비판의 이론적 근거를 없애고자 하였다. 곧 체제에 대한 비판이 공개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그리고 역사 자체를 부정한 것이기도 한다.
갱유(35년, 212년) 진시황제를 섬기던 술사(術士) 후생과 노생이 진시황을 비판하고 도망쳤다. 이에 진시황제는 수도 함양 내의 모든 유생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여 조금이라도 금기를 어긴 460여 명의 유생을 생매장해버렸다. 진시황제의 큰아들 부소가 이에 대해 간언하다가 분노를 사서 몽념이 주둔하는 군감 땅으로 유배되었다.
이 두 가지는 그야말로 전제정치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로 진나라가 망한 가장 큰 이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특히 유학자들이 이런 견해를 중시했다. 분서를 주도적으로 시행한 이사는 큰 죄를 지었다고 봐야한다.
9. 진시황제의 죽음 -
진시황제 38년 7월 천하를 순수하던 진시황제는 회계(지금의 상해 부근)까지 갔다가 낭야를 거쳐 평원진에 이르러 드디어 병에 걸렸다. 서둘러 수도 함양으로 향했지만 2천리나 떨어진 사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진시황제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임도 한 임금의 죽음도 아니었다. 그는 그 자체로 진 제국을 상징했다. 그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중국에서 그때까지 억눌렸던 모든 저항들이 뚫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시황제의 죽음 자체가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만일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일찌감치 죽고(개인의 성격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진시황제가 백성들을 위하는 어진 정치를 펼칠 수는 없다고 본다) 부소가 제위를 이어받았다면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정책을 펼쳐서 진나라가 오래 지속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10. 후계자의 부재, 혼선
죽음에 이르러 진시황제는 큰아들 부소에게 편지를 써서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를 주관하라고 명한다(곧 제위계승권을 준 것이다). 시황제의 죽음은 그를 호종하던 아들 호해, 환관 조고, 대신 이사 등 몇몇만이 알고 있었다. 이미 시황제가 죽은 마당에 권력의 단맛을 실컷 본 환관 조고는 진시황제의 유지를 어기고 제위를 바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문서를 위조하기로 마음먹고 호해를 설득하고 다시 이사를 설득한다. 이사는 결국 '하늘을 향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쉬며' 복잡한 심경으로 음모에 참여한다. 조고는 마침내 위조된 유언을 부소에게 보낸다.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소는 아들 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고 효성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칼을 내리니 자결하라.'
더불어 수십만 대군을 지휘하던 몽염에게도 자결을 명한다. 몽염은 자결하려는 부소에게 황제의 뜻을 확인하고 결정하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착한 아들 부소는 자결해버린다. 부소의 죽음으로 저항할 명분이 사라진 몽염은 사로잡히고 만다. 함양에 돌아와 시황제의 죽음을 발표한 호해는 2세 황제가 되었다. 이때가 진나라가 멸망 직전에 다다른 때이다. 만일 이때 부소가 황제가 되었다면 진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백성들의 저항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국제매너 (0) | 2006.06.08 |
|---|---|
| [스크랩] 알아두면 편리한 무료 사이트 (0) | 2006.06.05 |
| 스크랩 (0) | 2006.05.21 |
| [스크랩] 작가를 선택하시면 작가(30인)별로 30-40편의 명화를 설명과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0) | 2006.05.20 |
| [스크랩] 요리백과 (0) | 2006.05.19 |